민법상 계약은 사람이 아니면 체결할 수 없다. 자연인이던 혹은 법인이던 사람만이 계약에서 발생하는 권리 행사와 의무 부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의해 사람간의 계약 사이에 사람의 행위를 기계가 대신하거나 사람 대신 계약을 체결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대부분의 거래는 알고리즘 거래라고 하는 컴퓨터의 자동 거래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개인투자가 중에서도 자동매매 소프트를 사용해 주식을 매매하거나 로봇 자문을 이용해 자산운용을 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문제 및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처리를 한 단계씩 완전하고 정밀한 명령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 의한 조정의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럴 경우 알고리즘을 이용한 거래는 컴퓨터 프로그램 사이에 인간이 간여해 교신을 반복하는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통신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거래는 현실에는‘계약’으로 컴퓨터 이용자를 법적으로 구속한다. 그러나 계약의 성립에는 청약과 승낙의 의사표시가 합치할 것이 최소한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럴 경우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컴퓨터가 전자 데이터를 교환하는 현상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민법전은 합의에 의하지 않은 계약의 성립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컴퓨터 단말기에 의한 계약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명시의 의사표시 없이 계약의 성립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한편, 최근 주식시장에서는 컴퓨터에 의해 상장 조종과 같은 불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역으로 이러한 거래가 컴퓨터 이용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실시되어도 컴퓨터 이용자는 계약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부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특히 한 발 더 나가 높은 수준의 지성과 상호접촉성을 대비한 인공지능(AI)이 마치 사람과 같이 자립적으로 거래를 수행하는 경우 AI에 법인격을 부여해 대리인으로서 계약책임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기계화와 자동화가 추진되는 거래사회에서 기계가 계약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될 수 없는 경우에도 대리인처럼 주체와 분리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 기존 민법의 범주에서 사람과 기계, 기계간 상호작용을 계약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컴퓨터, 경우에 따라서는 AI를 매개로 한 계약의 요소가 될 청약과 승낙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계약의 성립을 어떤 논리에 기초할 것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알고리즘 거래 : 계약의 자동화의 진전
현대의 금융시장에서의 이루어지는 거래는 대부분 알고리즘 거래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지각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주문의 발주와 취소를 반복하는 HFT(High Frequency Trading)에 의한 초고속거래도 그 일종이다. 금융증권시장에서 알고리즘 거래란 시장 동향에 따라 컴퓨터 시스템이 매매주문의 시기, 가격, 수량 등을 결정해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실시하는 자동적인 매매를 지칭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자동거래는 1967년 미국에서 Instinet이 제안한 시스템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 시스템은 기관투자가가 뉴욕 증권거래소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에이전트(거래소의 회원업자)를 통하지 않고 대량거래를 발주할 수 있는 조직적인 네트워크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자동거래를 통한 수요는 점차 확대하고 전통적인 거래소 대신에 전자거래 시스템에 의한 데이터의 취급을 통해 가상 주문판이 형성되고 주요한 거래 브랜드가 하나의 플랫폼에서 매매할 수 있는‘사이버 거래소’로 형성하게 됐다.
□ 자동화된 거래에서 발생하는 문제
알고리즘 거래는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가격발견기능을 올린다는 점에서 거래 비용을 상회하는 편리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돌연 시스템 문제가 발생하고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가격이 통제되지 않을 경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이 가중된다. 미국에서는 2010년 5월 시스템 문제가 원인으로 플래쉬 크래쉬(flash crash)라는 주가가 순간적으로 폭락해 시장에 위협을 초래한 적이 있다. 2012년 8월에는 나이트 캐피탈 그룹이 알고리즘 거래의 문제로 경영위기에 빠질 정도의 손실을 보기도 했다.
특히 컴퓨터 알고리즘에서 제시된 지시에 따라 레이어링(layering) 혹은 스푸핑(spoofing)과 같은 주가조작행위도 발각된 적이 있다. 2013년 7월 영국금융행위규제기구(FCA)는 미국의 투자가 마이클 코셔에 의한 유럽 에너지 상품선물시장에서의 거래가 HFT에 의한 레이어링이었다고 판단해 시장 조작의 죄로 90만 달러정도의 민사제재금을 부과했다. 또 CFTC(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코셔와 그의 운용회사 팬더에너지트레이딩에 대해 2011년 2개월 이상에 걸쳐 스푸핑을 했다고 판단해 280만 달러의 민사제재금을 부과한 이외에 1년간 상품선물거래 금지 명령을 내렸다. CFTC는 그 후에도 HFT에 의한 지속적으로 불공정거래를 감시받고 있다.
□ 규제당국의 대응
HFT 전략을 취하는 알고리즘 거래로 인한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2010년부터 FINRA(미국금융거래업규제기구) 및 SEC(미국증권거래위원회)가 시장 접근의 방법 및 거래 규범을 변경할 것 등을 통해 다양한 대응을 수행하고 있다. 또 2011년 10월에는 IOSCO(증권감독자국제기구)가 ‘기술혁신이 시장의 건전성·효율성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발생하는 규제상의 과제’에 관한 최종보고를 발표하고 HFT와 같은 최신의 기술적 변화가 금융시스템에 유발하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거래관리 시스템의 도입 및 시장방해행위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 등 5가지 제언을 제시했다.
이를 받아들여 2012년에 CFTC는 상품거래소법을 개정해 ‘돗드=프랭크 월가 개혁·소비자보호법’(돗드·프랭크법)753조 (개정후 상품거래소법 6조C(1) 및 CFTC규칙 166.3)에서 CFTC가 시장조작 및 사기적 행위에 관련된 강력한 소추권한을 보장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 EU에서도 2014년에 역내의 금융상품 및 시장에 관한 규범을 정한 금융상품시장지령(MiFID :Market in Financial Instrument Directive [2004/39/EC])을 개정하고 투자회사에 의한 알고리즘 거래를 규제당국이 파악할 수 있도록 다양한 규범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도 2017년 5월에 성립한 ‘금융상품거래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에 따라 알고리즘 고속거래를 실시하는 투자자에 대해 등록제가 도입되었으며, 규제당국은 이러한 고속거래행위자에 대해서 보고 및 입회 검사 등의 감독권한을 가지게 됐고 금융상품거래소도 거래의 공정과 투자자보호 관점에서 고속거래행위자의 조사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