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치어다본 하늘은/ 여진의 가을이다/ 구름들은 많아서 어디로들 흘러 간다/ 하늘엔 가끔 말발굽 같은 것들도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진의 살 내음새 불어 온다/ 가을처럼 수염이 삐죽 돋아난 사내들/ 가랑잎처럼 거리를 떠돌다/ 호롱불,/ 꽃잎처럼 피어나는 밤이 오면/ 속수무책/ 그름의 방향으로 흩어질 것이다/ 어느 여진의 창가에/ 밤새 쌓일 것이다/ 여진 여진 쌓일 것이다」
이 시는 박정대 시인의 ‘여진(女眞)’이다
여진, 여진족(女眞族)을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진(女眞): 10세기 이후 만주 지방 동부에 살던, 수렵·목축을 주로 하는 퉁구스계의 민족.숙신(肅愼)·말갈(靺鞨)과 같은 계통 임. 12세기 초 완안부(完顔部)의 아구다(Aguda)가 요(遼)에서 자립하여 금나라를 세우고, 그 계보를 계승한 누루하치는 17세기 초 나중에 청조(淸朝)로 발전한 후금을 세웠음. 여진족. 여직(女直)은 여진의 별칭.
여진문자(女眞文字): 중국 금(金)나라 때 여진족이 만든 문자. 태조 3년(1119)에 완안희윤(完顔希尹)이 만든 대자(大字)와 희종(熙宗)이 만든 소자(小字)가 있음」
시베리아 동부에 사는 몽고계의 종족인 퉁구스 제족(Tunguz Tungus諸族)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으로부터 태평양연안에 걸쳐 사는 민족이다.
인구는 약 4만, 초원에서 순록사육과 다람쥐·사슴·담비·멧돼지 등을 수렵하며 모피는 교역(交易)에 사용하였다. 주로 텐트에 살며 이동생활을 하고, 부계씨족을 구성하였다. 족외혼은 수렵지역을 결정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스 정교에 편입되어 있으나, 주로 시베리아 북부의 여러 종족 간에 행해지는 원시종교의 일파인 샤머니즘(Shamanism)과 자연숭배도 활발하다.
퉁구스어(Tungus語)는 퉁구스제족의 언어이다. 사용인구수는 약 5만, 여러 가지 방언으로 갈라져서 지금까지도 전역에 걸친 공통어가 없다. 여진어·만주어 외에는 문자가 없었다. 모음조화와 교착어적 문법구조가 특징으로, 몽고어·튀르크어와 함께 알타이 어족을 이룬다.
재언하지만, 여진은 동부 만주에 살았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진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한(漢)나라 때에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어 오다가 10세기 초의 송(宋)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였다.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淸)나라 때는 만주족이라 칭하였다.
과거에 여진족이 우리 민족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부터였다. 그 무렵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는데, 고려는 이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에 이르러 만주 하르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고 북간도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그 후 여진은 세력을 확장하여 1104년에는 평양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려는 윤관(尹琯)을 보내 화맹(和盟)을 맺게 하는 한편 1107년에는 윤관으로 하여금 함경도 일대에 쳐들어온 여진족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 후 아쿠타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다. 뒤이어 요(遼:契丹)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였다.
고려를 이은 조선 초기의 대 여진정책은 이른바 채찍(whip)과 당근(carrot), 즉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썼다. 귀순을 장려하여 귀순자에게는 관직과 토지를 주었고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두어 국경무역을 허락하였다.
세종(世宗)은 4군(郡) 6진(鎭)을 두어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안선을 확보하였고, 세조 때는 남이(南怡)·신숙주(申叔舟) 등으로 하여금 준동(蠢動)하는 여진을 토벌케 하였다.
그 후 여진은 명나라의 국력이 점점 쇠약해지자 이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심양(瀋陽)에 후금(後金:63년 청(淸)으로 개칭)을 세우고, 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36년에는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후 조선은 할 수 없이 청(淸)에 조공(朝貢)하게 되었다.
여진어(女眞語)는 중국 금조(金朝;1115~1234)를 세운 여진족의 언어와 문자이다. 문자에는 대자(大字)와 소자(小字)가 있으며, 전자는 태조(太祖)가 완안희윤(完顔希尹)에게 명하여 한자의 해서(楷書)에 좇고 거란문자를 모방하여 1119년에 만들었던 것이라 한다. 그리고 후자는 1138년에 만들어서 1145년 이후에 금나라 국내에서 쓰여 졌다고 한다.
대자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으나, 소자는 음(音)을 적는 음자(音字)와 한자의 형상을 다소 개변(改變)하여 만든 의자(義字)가 있는데, 한문과 같이 위에서 아래로 쓰며 행(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좇는다. 금조 당시의 여진어는 <대금득승타송비(大金得勝陀頌碑)> 등의 금석문(金石文)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어와 그에 대한 여진어를 여진문자로 쓰고, 다시 그 한자에 의한 표음(表音)을 게재한 것과, 따로 여진자만을 본 딴 두 계통의 여러 종류에 달하는 이본(異本)이 있다.
흔히 여진어는 만주어에 가까운 퉁구스어(Tungus語)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진자가 아직 완전히 해독되고 있지 않은 현실이다. 또한 그 외에 자료의 양과 종류가 아직까지는 극히 한정돼 있으므로 여진어도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