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컴퓨터는 대리인인가? 도구인가?
○ 代理法理의 적용을 둘러싼 미국의 태도
미국에서는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보는 판결 사례(Automobile Insurance Co. v. Bockhorst)가 있으며 현재에도 구체적인 사안의 해결을 위해 법원이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일반적 견해로는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구성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어 미국‘대리법 제3차 리스테이트먼트’해설에서도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첫째, 컴퓨터는 사람이 아니기에 대리관계를 성정할 수 없다는 점, 둘째 대리인은 제3자와의 관계에서 계약상의 의무를 스스로 부담해야만 하지만 컴퓨터는 사실상 계약에서 발생하는 계약상의 의무를 부담할 능력이 없다는 점, 셋째 대리인에게 고의·과실이 없는 경우에도 대리인의 불법행위책임은 본인이 부담하기 때문에 그 경우에 본인의 부담이 과대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의 대리인 능력을 부정하고 있다.
또 계약책임의 귀속점이 컴퓨터의 이용자(사용자)에 한정된다는 점에서도 비판적이다. 컴퓨터의 오작동의 원인이 프로그램 오류에 의한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이해관계자 전원이 계약책임을 부담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에서는 컴퓨터 자신이 주체적으로 계약의 체결행위를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의제한 후에 계약의 성립의 문제와 계약의 효과귀속의 문제를 분리해 입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 성립한 계약의 권리의무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원칙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의 이용자에게 계약의 효과가 귀속할 것을 전제로 해 계약은 컴퓨터(전자 에이전트)의 상호작용에 의해 성립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계약체결의 구도는 통일전자거래법(UETA), 통일전자정보거래법(UCITA), 통일상법전(UCC) 제2편에 구체적으로 규정돼 있다.
○ 대리법의 적용을 둘러싼 독일법의 논의
전술한 바와 같이 컴퓨터에 의한 자동거래는 의사표시를 한 경우에 표시의사의 결여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즉 컴퓨터에 의해 자동적으로 표시가 이루어진 경우 컴퓨터의 이용자는 컴퓨터가 자동으로 표시를 하도록 프로그래밍 하면서도 실제로는 컴퓨터가 법적 효력을 수반한 표시를 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표시의사가 없는 의사표시에 의한 계약(법률행위)은 유효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컴퓨터를 매개로 한 거래에 대해 대리에 관한 규정을 유추적용하고 계약 성립을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지지하는 학설은 컴퓨터가 의사표시를 형성한 표시를 한다는 행위는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할 것, 그리고 컴퓨터의 역동성, 프로그램과 데이터 메모리를 기초로 발전할 가능성 등을 이유로 컴퓨터를 ‘이행보조자’로 보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대해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간주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설은 독일 민법의 대리에 관한 규정은 대리인이 자기 책임에 따라 자기 의사로 타인의 이름에 기반한 의사표시를 실시할 것을 정하고 있지만 컴퓨터는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이행보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독자적으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는 불완전한 독립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취급할 경우 거래의 안전을 위해 규정한 무권대리인의 책임에 관한 법률 규정이 의미를 잃게 된다. 즉 독일 민법의 무권대리인 규정은 대리인을 이용할 본인이 추인(사후승인)하지 않은 경우 무권대리인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의사도 자력도 없는 컴퓨터에 그러한 책임을 묻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컴퓨터를 대리인으로서 계약의 성립을 구성한다는 생각은 독일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지만, 새로운 의사표시개념을 형성해 이를 인터넷상에서의 의사표시에 대응시키려는 움직임은 있다.
○ ‘컴퓨터 표시’라는 개념의 차용
컴퓨터에 의한 의사표시행위를 해석하는데 학설은 우선 자동판매기에 의한 의사표시에 대한 민법전의 해석을 응용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자동판매기가‘의사의 축적’속에서 단순히 결정을 내린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컴퓨터는‘의사의 축적’을 일정 요건으로 이후 다양한 사정을 감안해 스스로 계산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자동판매기에 의한 거래와 컴퓨터에 의한 거래는 동일선상에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인터넷상의 의사표시는 표시가 이루어질 때 사람의 관여 정도에 따라 두 종류로 분류된다. ‘전자적으로 전달될 의사표시’와 ‘컴퓨터 표시’이다. 먼저‘전자적으로 전달될 의사표시’는 의사표시의 노출시에 사람의 관여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온라인 쇼핑의 주문화면에서 필요한 사항을 기입하고 상품 신청을 할 경우 매수인의 행위가 이에 해당된다. 사람의 관여가 있다는 점은 사람의 의사를 비교적 용이하게 표시에 귀속시킬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사표시개념을 유연하게 적용시킴으로서 계약의 성립을 유도할 수 있다. 이에 대해‘컴퓨터 표시’는 의사표시의 노출시에 사람의 관여 없이 의사표시라는 행위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완전 자동화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온라인 쇼핑에서 상품의 매도인측의 행위, 즉 컴퓨터가 보내는 자동반응이 이에 해당된다.
당초 컴퓨터 표시에 대해서도 표시의사의 결여가 계약 성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문제는 있었다. 컴퓨터를 의인화하지 않고 컴퓨터를 스스로 결정 내리지 못하는‘도구’로 본다면 컴퓨터에 의한 표시는 컴퓨터를 활용해 의사표시를 하려는 컴퓨터 이용자에 귀속시켜야 할 규범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표시를 받는 측의 신뢰보호와 거래의 안전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컴퓨터 표시를 사람에게 귀속시키기 위한 판단기준에‘위험책임’의 사고를 도입하려는 유력한 견해가 제시됐다. ‘위험책임’이란 위험을 발생시킨 것을 설치·지배 또는 관리하고 있는 이용자는 이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책임을 부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컴퓨터 표시에 적용할 경우 표의자가 표시의사를 결여한 것은‘표시에 대한 자기 태도의 객관적 의미를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이 표의자의 범주에 있는지 여부를 먼저 판단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의 이용 시점에서 이용자의 인식 및 주의의무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위험지배성의 정도를 예측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독일은 컴퓨터를 매개로 한 계약에 대해 컴퓨터를 계약의 주체로 또 주체와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고 도구로서 이용하는 사람이 하는 통상의 계약으로 이해하고 있다.
○ 정리
개방된 네트워크에서 컴퓨터에 의한 거래, 즉 인터넷 거래는 사전의 합의 및 당사자 간의 신뢰관계를 기초로 계약법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렵다. 이 때문에 자동판매기의 거래 사례와 마찬가지로 계약 성립 및 책임의 귀속 주체를 검토해야만 한다. 또 인터넷 거래는 자동판매기에 의한 거래보다도 복잡한 거래로 원격자간 거래라는 점에서 계약상 리스크도 높다. 계약의 효과를 컴퓨터 이용자인 인간에게 귀속시키기 위해서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보어야 한다는 견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 일환으로 미국과 독일은 컴퓨터를 대리인으로 간주하려는 논의에 불을 지핀 것이다. 계약에서 발생하는 책임의 최종 부담자를 고려할 경우 현행 법이론은 컴퓨터가 대리인이 될 경우 컴퓨터 자체가 계약책임을 지는 책임주체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 대안으로 컴퓨터를 단순히‘도구’로 이해하고 사람이 도구를 활용하는‘사람’과‘도구’의 일반적인 관계성에 기반해 효과 귀속을 고려함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컴퓨터에 의해 계약이 자동화되고 계약체결시에 사람이 직접 관여를 하지 않아도 컴퓨터가 수행하는 행위를 모든 사람의 의사에 연계시켜 도구 사용자의 의사를 전제로 한 자동화된 계약의 성립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UNCITRAL(국제연합국제상거래법위원회)의 입장과도 일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