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간·기계의 상호작용에서 계약이 성립하는가?
□ 인간과 기계에 의한 거래와 계약법 관계
행정규제, 자주규제 등 알고리즘 거래에 관한 각종 규범을 정하는 것은 시장의 공정과 공평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컴퓨터 알고리즘 및 AI가 자동적으로 실시하는 거래를 각 계약으로서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는 이론상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그 이유는 민법전에는 계약의 성립에 관한 명문의 규정이 없이 청약과 승낙이 어떻게 인정될 것인가에 대한 정함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청약과 승낙의 의사표시의 합치에 의한 합의의 형성이라는 전통적인 의사이론 하에서는 의사를 갖지 않는 컴퓨터가 상호 데이터를 송·수신함으로써 기존의 계약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동판매기 등의 단순한 기계와의 거래에서 복잡한 인터넷 거래에 이르기까지 기술혁신의 과정에 따라 사람과 기계의 상호 거래가 지금까지 우리 계약법상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증권시장에서 알고리즘 거래는 다수 vs. 다수의 거래이기 때문에 다수당사자계약의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단순화하기 위해 일 vs. 일의 거래를 염두에 두고 검토해 본다.
□ 단순 기계와 인간의 거래 (자동판매기에 의한 매매)
○ 학설의 판단
자동판매기에 의한 상품 등의 매매는 매매계약의 일종이다. 따라서 계약이라는 법률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의사표시의 합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표시를 하는 주체가 자동판매기라면 의사가 결여된 기계가 행위자가 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는 의사표시에 하자가 발생함으로 인해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편 거래의 안전을 고려한다면 자동판매기 그 자체에 의사를 관념시켜야 하기에 다른 여하한 방법으로 계약의 성립을 관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학설은 독일법의 이론을 기초로 자동판매기에 의한 매매를 ‘사실적 매매관계’의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이는 의사를 갖지 않은 기계가 의사표시를 한다는 이론적 모순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계약 당사자가 계약의 법적인 구속력을 받는 것이 사회적인 거래관행으로 보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동판매기는 단순히 매도인이 경비 절감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전이 없을 경우 자동판매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며, 기계 고장으로 잔돈이 나오지 않을 경우 금전적 손해가 발생하는 등 불이익이 구입자에게 전가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실적 계약관계의 이론은 거래의 보호를 중시한 나머지, 당사자의 일방의 이익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측면도 있어 균형감을 상실한 부분도 있다. 이 때문에 자동판매기에 의한 매매에서는 자동판매기를 설치한다는 행위 속에 이미 설치자의 의사표시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인식이 지지를 받게 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기계의 설치자 및 매도인은 매수인에 대해 직접의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표시된 가격이 설치자의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묵시의 의사표시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판례의 방향
자동판매기의 고장 때문에 승마투표권의 구입이 방해됐다고 주장한 원고(X)가 계약의 성립을 다툰 사안이 있다 (오사카지방법원 2013년 7월 30일).
이 판결은 계약체결주체는 어디까지나 설치자이며 설치자가 자동발권기의 작동을 통해 의사표시를 실시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즉, 피고(Y)에 의한 승마투표권의 자동발권기의 설치는 청약의 유인이며 X가 이에 현금과 투표 카드를 투입한 시점에서 X에 의한 본건 계약의 청약의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인정됐다. 그리고 자동발권기의 화면상에 ‘계산기에 접속하고 있다’는 표시가 나타난 시점에서 Y가 구입자의 구입 청약에 대해 승낙의 의사표시를 했고 이에 따라 Y와 X와의 사이에 승마투표권의 구입계약이 성립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보았다. 또 실제로 승마투표권이 발권된 것 자체는 계약의 성립과는 관계가 없다고도 판단했다.
판결에 의하면 자동발권기의 작동을 통해 Y에 의한 승낙의 의사를 표시하려는 표시가 X에 제시된 것은 자동발권기의 설치자인 매도인이 계약상의 이행행위에 착수한 것이며 이 시점에서 이미 계약이 성립했다고 해석했다.
이 판결은 독일법에 아주 유사한 판결로 보인다. 독일법의 이론은 자동판매기의 설치자인 매도인이 상품을 기계 속에 준비하는 행위는 사전에 상품의 인도시에는 일정의 가격을 청구한다고 하는 의사가 기계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청약자로서 매수인이 동전 투입구에 나타난 때 처음으로 매수인이 계약의 상대방으로 구체화되고 축적되어 있던 의사가 기계 장치 속에서 나와 매수인에 대한 의사표시가 시행됐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의사와 표시의 동시성 및 표시의 명료성이 담보된다. 다만 이 논리는 자동판매기의 기계적 처리가 설치자의 사전의 지시내용에 따를 경우에 타당할 것이다.
□ 복잡 기계와 인간의 거래 (폐쇄 네트워크에서의 컴퓨터 통신)
컴퓨터에 의한 기술혁신에 힘입어 산업의 정보화가 추진됨에 따라 기업 간 거래에서는 컴퓨터 단말기를 이용해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컴퓨터 시스템에 거래 조건을 조합해 속도감 있게 거래를 추진하는 컴퓨터 거래의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컴퓨터를 통해 지속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기업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통신회선을 통해 거래 데이터를 컴퓨터 단말기끼리의 교환거래의 대표적 사례가 EDI(전자데이터 교환)이다.
EDI 거래에서는 기업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최초 단계에서 기본계약과 데이터교환협정, 개별계약의 3가지 계약이 오고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별계약에서는 상품의 수량 및 가격 등 변수부분에 대해 합의를 하면 되고 본래 의미에서 계약적 합의는 기본계약에서 수행되며, 거래상의 판단 및 리스크는 당사자 사이에 공유된다. 이 때문에 프로그램의 버그 및 데이터의 오류 처리도 의사표시의 하자와는 관계없이 잘못된 처리에 의한 손해는 보험의 이용을 통해 전보된다.
이러한 네트워크형 거래에서는 계약체결시에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기계에 의한 거래라 해도 기본계약을 기초로 해서 거래가 반복되기 때문에 의사표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의 의사를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또 기본계약이 존재하는 거래에서는 계약을 체결하는 최종단계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의사결정 시점이 계약 과정의 최초 단계로 이전된다는 이론을 구성할 수도 있다. 이는 계약의 성립은 계약의 중요한 부분이 합의된 점에서 성립한다고 하는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네트워크형 거래관계를 구축한 후에는 더 이상 계약의 유효성을 검토하는 상황이 아니라 구축된 시스템 속을 정보가 유통하는 것으로 법적으로는 계약의 이행과정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