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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마지막 선택나경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나경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含 洇 徧 裊 裊 함 인 편 요 뇨

帶 雨 更 依 依 대 우 갱 의 의

無 限 江 南 樹 무 한 강 남 수

東 風 特 地 吹 동 풍 특 지 취

 

연기를 머금고 자꾸 나부끼더니

비가오니 더욱더 싱싱하게 푸르러,

강남의 그 많은 나무들인데

동쪽에서 유달리 부는 바람일세.

정도전의 ≪영류(詠柳)≫라는 시(詩)인데, 우리말로는 〈버들을 읆으며〉 쯤 될 것이다. 강남(江南)은 강의 남쪽인데, 서울의 한강 이남지역을 말한다.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이남으로, 흔히 남쪽의 먼 곳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중국 양자강 이남의 지명인데, 지금은 양자강 하류 남방의 델타지대인 강절(江浙)평야 일대를 가리킨다. 기후가 온난하고 비가 많으며, 중국의 곡창지대로 벼농사가 성하다.

4세기에 오호(五胡)의 침입에 의해 동진(東晋)이 강남에 건국하였고, 남북조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당나라 때는 강남도를 설치하였으며, 귀주(貴州)·광동(廣東)·광서(廣西)의 삼 성 (城)을 제외한 넓은 지역을 포함하였다. 14세기 명나라는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던 이곳에서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였다.

고려 10도 중의 하나가 강남도(江南道)였다. 성종 14년(995)에 전주(全州)·영주(瀛州)·순주(淳州)·마주(馬州) 등을 강남도라고 하였다. 그 후 강남도와 해양도(海陽道)가 통합되어 전라도가 되었다. 이 시 중에서 따지(地)자는 무의미(無意味)한 조사(助辭)로 쓰였는데, 일종의 부사(副詞:adverb)를 만드는 어조사이다.

정도전(鄭道傳;?~1398)은 고려 말·조선초기의 문인·학자인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운경(云敬)의 아들로 공민왕(恭愍王) 11년(1362)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를 지냈고, 19년(1370)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다.

우왕(禑王) 9년(1383) 동북면도 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참모(參謀)가 되었고, 다음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우왕 11년(1385)에 성균제주(成均祭酒·남양부사(南陽府使)를 지냈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에 승진했으며, 14년(1388) 위화도(威化島)회군을 계기로 신진 세력이 집권하게 되자, 이성계의 우익(右翼)으로서 지공거(知貢擧)·지신사(知申事)를 역임했다.

조준(趙浚)의 전제개혁안(田制改革案)을 단행토록 적극 건의하고 척불(斥佛)을 주장하며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탄핵하여 유배(流配)케 하여 조선 개국의 정지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이듬해 이성계·조준·심덕부(沈德符)등과 창왕(昌王)이 왕씨(王氏)가 아니라 하여 강화에 함께 추방하였다. 그리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함으로써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봉해진 뒤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공양왕 3년(1391)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가 되었다.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이 득세하자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잠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1392년 한때 풀려 나왔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보주(甫州;醴泉)의 옥에 투옥되었다.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충의군에 복직되고, 조준·남은(南誾) 등과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조 건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 태조(太祖) 3년(1394) 한양 천도(遷都)를 주장하여 실현케 했고, 이듬해 정총(鄭摠)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撰進)했다. 태조 6년(1397) 동북면(東北面)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역말을 갈아서 타는 곳)을 신설했으며 성균제조(成均提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서 정조사(正朝使)가 올린 표문(表文)이 잘못되었다 하여 기초자를 잡아오라 하자, 그는 명나라와 실력으로 항쟁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군사훈련·군량미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남은 등과 방석(芳碩)을 옹호하고 정실 소생의 왕자들을 죽이려 한다는 혐의로 방원(芳遠;太宗)에게 무참하게도 참수(斬首)되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조선조개국 후 군사는 물론 외교·성리학·역사·행정·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초기의 건국 작업에 활약했으며,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하였다.

김영환 기자  yyy91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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